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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부정공>여절교위충무위부사과삼탄공휘대춘묘표(勵節校尉忠武衛副司果三灘公諱大春墓表)
勵節校尉忠武衛副司果三灘公諱大春墓表 余嘗過昇平見漾碧亭遺址在江上問是三灘趙公所築而巖有河西金先生及玉峯白公與公同遊題名余摩挲久之爲誦地不忍荒水不忍廢後十年公後孫鍾悳袖公行蹟來示余曰吾祖當 仁 明之際目見乙巳慘禍絶意世路守志高蹈築亭於漾碧之滸逍遙自適若將終身焉與河西玉峯從遊相與酬唱河西詩落魄論心地忘情酒一盃即 贈吾祖者世代既遠文獻散逸生卒及官職履歷亦不可攷略綴譜牒所載者只如此願賜一言以圖不朽也余曰金先生取友必端而又爲推許則見木可以知山矣且泯跡遯世不輟其囂囂之樂則其志趣之可尚豈世儒俗士之所能及哉又按狀曰公生有儁才蔭補勵節校尉嘗言士當利器竣時躬行孝弟奉喪祭以禮處夫婦以敬敎子弟以義平居無疾言遽色胷懷坦蕩接人以和好古勵行為鄉黨誦慕此爲可據之最何必多乎哉公諱大春字春之 高麗門下侍中諱璋爲鼻祖傳至玉川府院君諱元吉文章節行與圃牧相埒賜諡忠獻是生諱瑜官副正當麗季喪紀壤廢之餘前後守制盡禮八 我朝屢徵不起自杜門洞南下順天之住巖即公五代祖也高祖諱斯文 贈吏曹參議曾祖諱智崙察訪祖諱穩直長考諱淑璟忠順衛全州崔三戒其外祖也所生父諱淑琦從仕郎以行誼聞公初配延安李氏參奉贈參判繼長女繼配玄風郭氏俱無子以兄校尉大楠之子懋爲嗣薦除參奉曰晫宣敎郎曰똹曰晬宣敎郎曰安愼之其子若婿也曾玄以下不盡錄而曾孫時聖有至行墓在順天府西弓角山金洞之麓噫向丑之原高四尺者是清士攸藏有來千秋樵牧其勿蹂躪可也 恩津 宋秉璿 撰 여절교위충무위부사과삼탄공휘대춘묘표(勵節校尉忠武衛副司果三灘公諱大春墓表) 附誌銘 내가 일찍이 승평(昇平)을 지나다가 양벽정(漾碧亭) 옛터가 강가에 있는 것을 보았 었다. 양벽정은 삼탄 조공이 세웠는데 바위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선생과 공이 함께 놀면서 바위에 나란히 새긴 이름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참동안 그걸 어루만지면서 땅도 차마 이를 남기기 위해 황폐하지 못하도록 물도 이를 없애지 않았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 후 十년 공의 후손 종덕(鍾悳)이 공의 행장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꺼내 보이면서, 『우리 할아버지께서 인종(仁宗)·명종(明宗)때를 당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참혹함을 보고 벼슬에 나갈 뜻을 버리고 뜻을 지키며 양벽 물가에 정자를 지어 소요하면서 한가하게 지내다 생을 마치려 했습니다. 하서 김인후 선생과 옥봉 백광훈 선생과 함께 노닐면서 시를 수창하였는데 하서의 시에 「정신없이 마음속을 터놓고 한잔 술에 시름 잊네(落魄論心地 忘情酒一杯) 한 것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를 두고 읊은 것입니다. 세대가 이미 멀어서 문헌이 없어져 생졸연대와 관직 경력 역시 상고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첩에 기록된 것을 대략 기술한 것이 이렇습니다. 한 마디 써주셔서 영원히 전하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나는 이에 이렇게 말했다. 『하서 김선생은 반드시 단아한 분을 가려 사귀었을 것이니, 나무를 보면 산 전체를 다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몸을 감추어 은퇴하였으니 그 은은한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으니 어찌 속된 선비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다. 또 행장을 살피건대 공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특이하여 음보(蔭補:조상의 은덕으로 벼슬에 임명되는 것)로 여절교위가 되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는 때를 기다려 크게 쓰여야 한다.』 하고는 몸소 효제(孝悌)를 실천하고 상제(喪祭)를 예법대로 하였다. 부부사이에 서로 존경으로 대하고 자제를 의(義)로써 가르쳤다. 평소에 말을 빨리하거나 안색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마음이 넓어서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하게 하였고 옛 사람들처럼 행하기를 힘써 고을에서 그 덕을 사모하였으니, 이것이면 상고할 수 있는 것이지 하필 많아야 되겠는가. 공의 휘는 대춘 자는 춘지(春之)인데 고려 문하시중 휘 장이 시조이며 옥천부원군 휘 원길은 문장과 절행(節行)이 포은·목은과 같아 충헌(忠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 분이 휘 유를 낳으니 벼슬은 부정(副正)으로 고려말 상례가 문란하였는데도 부모의 상에 예를 다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서 남쪽 순천 주암으로 내려왔는데 바로 공의 五대조이다. 고조 휘 사문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지륜은 찰방이요, 조 휘온穩)은 직장(直長)이며 고 휘숙경(淑璟)은 충순위이며 외할아버지는 전주(全州) 최삼계(崔三 戒)이다. 생부(生父) 휘숙기(淑琦)는 종사랑(從仕郎)인데 행의(行誼)로 알려졌다. 공의 처음 배(配)는 연안이씨 참봉으로 참판에 추증된 계장(繼長)의 딸이며 계배는 현풍곽씨(玄風郭氏)인데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형인 교위(校尉) 대남(大楠)의 아들 무(懋)를 양자로 두었는데, 참봉에 천거되었다. 선무랑(宣敎郎) 탁(晫)·길(똹)·수(晬)는 손자이며 안신지(安愼之)는 손녀사위이다. 증손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하는 데 증손 시성(時聖)은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공의 묘는 순천부 서쪽 궁각산(弓角山) 금동(金洞) 기슭에 있다. 아! 축좌(丑坐) 언덕의 四척 비석이 바로 청렴한 선비의 것으로 천년동안 전해져야 하니 초동 목수들은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 지음 註:을사사화(乙巳士禍):이조 명종(明宗) 원년에 일어난 사화 명종의 외숙 윤원형과 인종(仁宗)의 외숙 윤임(尹任)의 불화로 인종이 승하하자 윤원형이 윤임의 일가 및 그 일당인 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명사를 몰아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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